
범죄 영화에서 주인공이 끝까지 살아남으면 정의가 승리한 걸까요, 아니면 그저 더 교활했던 걸까요? 저는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를 처음 봤을 때 바로 이 질문에 사로잡혔습니다. 1980년대 부산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조직폭력배의 세계를 다루지만, 단순한 액션 영화와는 거리가 멉니다. 최익현이라는 인물이 세관 공무원에서 조직의 핵심 인물로 변모하는 과정, 그리고 최형배와의 관계 변화를 통해 권력과 배신의 구조를 사실적으로 보여줍니다.
최익현, 계산된 생존의 기술
영화 속 최익현은 1982년 부산 세관에서 밀수품을 관리하던 평범한 공무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세관 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가족이 적다는 이유로 모든 책임을 떠안고 해고당하게 됩니다. 여기서 이현이 보여주는 선택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우연히 발견한 필로폰을 경찰에 신고하는 대신 일본 야쿠자와 연결해 부산 조직에 넘기는 것이었죠.
이 장면을 보면서 저는 이 사람이 단순히 돈에 눈이 먼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범죄 영화에서 주인공은 보통 충동적이거나 감정적인 선택을 하는데, 이현은 달랐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계산하고 판단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조직 보스 최형배를 만날 때도 선을 타다가 망신을 당하지만, 오히려 형배의 집안 어른이라는 사실을 활용해 관계를 만들어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현의 네트워킹 능력입니다. 네트워킹이란 단순히 사람을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순간에 적절한 인맥을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이현은 경주 집안의 촌수를 이용해 부장 검사와 연결되고, 이를 통해 형배를 불구속으로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이런 장면들을 보면서 조직폭력배 세계도 결국 인간관계와 권력 네트워크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솔직히 이 부분에서 저는 이현이라는 캐릭터가 참 불편했습니다.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고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계속 붙는 모습이 현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사람 같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런 사람이 실제로 살아남는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최형배, 의리와 권력 사이의 균열
최형배는 부산 최대 조직의 수장으로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이현을 가족처럼 대하며 함께 사업을 확장해 나갑니다. 호텔과 파칭코 사업까지 합법적으로 승인받으며 조직을 키워가는 모습은 단순한 건달이 아닌 사업가에 가까웠습니다. 여기서 파칭코란 일본식 도박 기계로, 당시 한국에서도 성행했던 유흥 사업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형배와 이현의 관계는 김판호라는 인물을 둘러싸고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판호는 과거 형배의 부하였지만 자신의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며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한 상태였습니다. 이현은 명분을 만들기 위해 판호를 자극하고, 결국 형배가 판호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의 시각차가 드러납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형배의 변화였습니다. 처음에는 이현을 무한히 신뢰하며 "우리 둘이 하나의 몸"이라고까지 말했던 형배가, 점차 이현의 행동에 불안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특히 형배가 칼에 맞는 사건 이후 이현을 의심하는 장면에서는 권력 관계에서 신뢰가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보여줍니다.
여기서 형배의 선택은 전형적인 조직 폭력배의 방식입니다. 의심이 들면 먼저 제거하는 것이죠. 형배는 이현에게 조직에서 나가라고 통보하고, 아들에게까지 "칼은 절대 주지 말라"고 신신당부합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저는 형배가 이현을 완전히 정리하지 못한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아마도 과거의 정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아직 이현이 필요했던 걸까요.
범죄와의 전쟁, 누가 진짜 승자인가
1990년대 초반 정부는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전국의 조직폭력배를 대대적으로 소탕합니다. 이 정책은 조직범죄 단속법에 근거한 것으로, 당시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조직범죄 단속법이란 조직폭력배의 활동을 체계적으로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별법으로, 일반 폭력 사건보다 훨씬 강력한 처벌이 가능했습니다.
영화에서 형배와 판호는 최우선 체포 대상자로 지목됩니다. 하지만 이현은 다릅니다. 그는 조검사와 은밀한 거래를 통해 자신은 가벼운 처벌을 받고, 형배를 검찰에 넘기는 계획을 세웁니다. 심지어 위조 여권까지 만들어 형배를 속이고, 결국 형배가 체포되는 순간에도 옆에 있었습니다.
이 부분을 보면서 저는 "누가 진짜 나쁜 놈인가"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게 됐습니다. 형배는 폭력을 사용했지만 나름의 의리를 지키려 했고, 이현은 직접적인 폭력은 쓰지 않았지만 철저하게 배신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범죄 영화에서는 폭력배가 악당으로 그려지지만, 제 경험상 이 영화는 그런 단순한 구도를 넘어섭니다.
2024년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조직폭력 사건은 과거에 비해 크게 감소했지만, 여전히 사회적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단순히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권력 구조와 부패, 그리고 인간의 욕망이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이현은 손자의 돌잔치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를 "대부님"이라 부르죠. 결국 이현은 살아남았고, 어쩌면 더 큰 권력을 얻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저는 범죄와의 전쟁이 정말 승리한 건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 영화를 통해 배운 것은 범죄 조직도 결국 사람의 관계로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는 신뢰보다 이해관계로 유지됩니다. 형배와 이현의 관계가 무너진 것도, 결국 서로의 이익이 충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범죄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이 작품에서 단순한 액션이 아닌, 인간 욕망의 민낯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저 역시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한동안 "살아남는 것과 옳은 것은 다르다"는 생각을 계속하게 됐습니다.